로마에 도착한 첫날 저녁부터 바로 뒷골목을 여행했다. 한밤 중에 그래피티를 구경하며 다녔다. 그래피티 태깅은 인적이 드문 밤에 많이 하기 때문에 어딜가나 상점 셔터에 많은 편이다. 낮에는 셔터가 올라가 있어서 잘 보이지 않다가도 상점의 문이 하나 둘씩 닫히면 그제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밤의 도시와 낮의 도시는 그런 면에서도 다른 풍경이다. 그렇게 셔터를 따라 들락날락거리면, 로마의 밤거리는 낙서들의 세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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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밤 밤길을 따라 걷다가 만나게 되는 태깅들.
ⓒ 정갑선
이탈리아


로마는 치안이 불안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그날밤은 안전했다. 위험할 만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숙소를 찾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늦은 밤 숙소를 찾는 행렬들 속에서 나 홀로 그림 감상을 한다.


시차가 적응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위의 우려와 달리 시차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긴 하루를 보낸 기분이었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아침이 유럽에서의 저녁으로 끝났으니, 비행시간 만큼 인생이 추가된 것 뿐이었다. 되돌아 갈 때 다시 그대로 갚아야 할 빚 같긴 하지만 말이다.


낮에도 그래피티를 따라 걸어다녔는데 그 길을 따라 걷다보니 젊은 분위기의 숍이 많은 곳으로 이어졌다. 떼르미니역과 칸부어역 사이 한블럭 뒤에 있었는데 재즈 아카데미가 있어 분위기도 자유로워 보였고, 재미난 숍이 몇 개 있었다. 낯이 익은 듯, 낯선 이 골목이 마음에 들었다. 골목이름은 비아 우르바나였다. 로마라고 하면 유적지를 많이 떠올리는데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역시 새로운 기운이 감돈다. '클러빙'을 주목적으로 여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핫'한 곳은 가지 못 했지만 딱 내 마음에 들었다.


현대 로마에 반달리즘은 별로 없었다





  
▲ 로마의 낮 그래피티를 따라 걷다보면, 나도 모르는 어딘가를 걷게 된다. 관광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
ⓒ 정갑선
이탈리아


 

낙서를 따라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관광지에서 점점 멀어졌다. 이곳에서는 문화 유적지에 대한 반달리즘은 만나기 어려웠다. 반달리즘이라는 단어 자체가 로마의 유적지를 파괴하려는 행위 때문에 생긴 개념이고, 유적에 그래피티를 하는 행위에도 똑같이 반달리즘이라는 단어가 적용되기 때문에 더 유심히 관찰하게 됐다. 문화재에 낙서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분위기라면 재빨리 지울 것이다. 관광이 중요한 도시에서 낙서를 방치하면 아무래도 경제적으로도 손실이 클 테니까.


이곳에서 그래피티를 지우는 장면을 우연히 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다른 색 페인트로 덧칠하는데 이쪽 동네는 건물이 대리석이라서 난감한 것 같다. 콤프레샤 같은 것으로 약재를 강하게 뿌려서 착색 성분을 벗겨낸다. 신기했다. 성분이 뭘까 궁금해서 아저씨들 일하는데 살짝 다가가서 냄새도 맡아 봤다. 화학약품 냄새가 강했기 때문에 방독면 없이는 참기가 힘들었다.








관광지도 밖에서는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에 들어섰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우리처럼 영어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는지. 대체로 영어를 잘 못했다. 유명 관광지 근처에서는 간단한 수준이라면 3, 4개국어 하는 상인들도 많았지만 벗어나면 아니다.

그제서야 관광지가 아닌 걸 알았는데 시내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지도 밖으로 나와 일상을 살아가는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 들어왔다. 불안했다. 꽁짜로 얻었다는 게 문제였는데, 미리 미리 좋은 지도 샀더라면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고, 재미있는 여행이 됐을텐데 아쉬웠다. 아무리 아낀다해도 아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 간다.


수퍼마켓을 찾기 어려웠다. 길을 물어보려고 바에 들어가서 물을 주문했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내가 실수로 주문한 물은 탄산수였다. 맛도 익숙치 않았지만 탄산이 든 음료수를 끊은지 1년이 넘어서  먹어도 될지 고민스러웠다.

찌뿌둥한 얼굴으로 바리스타에게 물 맞나고 물어봤다. 못 알아듣는다. 옆에 있던 손님이 통역해줬다. 그녀는 필리핀 이민자였다. 서구인은 영어를 못 하고, 아시안 둘은 영어를 하는 낯선 상황이다. 다행히 바리스타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이미 개봉한 물을 교환해 줬다. 고맙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몰라 더 불안했다. 비행기에서 이탈리아어 읽는 법을 연습해서 '네, 아니오. 감사합니다.' 정도는 알았지만 여행 안내서에 나와있는 단어 몇 시간 외운다고 사용 가능한 언어란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무용지물이었다.

구석구석 구경을 하다보니 동네에 있는 작은 공원에 다다랐다. 거기도 낙서들이 많았다. 이만하면 많이 왔다 생각하고 내 이름도 하나 적고왔다. 거기가 로마 끝이라 생각하고, 작은 도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마는 기차타고 몇 정거장 더 나가야될 만큼 큰 도시라고 하니 그나마도 나름은 한 복판이었던 것이다.
 

중앙역 쪽으로 되돌아 오는 버스를 타려는데 탈 줄 몰라 당황스러웠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서 걸어갈 엄두도 안났지만, 길도 제대로 몰랐다. 그 정류장을 지나는 버스에는 '아르젠티나'랑 '베네치아'가 써있었는데, 둘 중에 어느 곳으로 가는지 몰랐다. 그게 적응이 안됐다.
버스가 생긴 건 시내버스 같은데 왜 다른 지명이 써 있는지 이해가 안됐는데, 강남에 있는 '테헤란로'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떼르미니역 이라고 썼더라면 쉬웠을 것을.

그런 것들을 몰랐기에 옆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현지인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못 들은척, 모른척 한다. 모른척을 하는 건지 진짜 모르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영어를 쓰는 것이 실례라던데, 혹시 영어로 물어봐서 화가 났나? 하지만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꽉 찬 표정 또한 아니었다. 내가 말이라도 걸까봐 부담스러운 것처럼 슬금슬금 피하고 있었다.
언어 구사능력에 따라 대화 중에 일종의 서열 같은 게 생겼다. 선생님을 어려워하는 학생 같은 모습이다. 서양인과 외국어로 대화하는 중에 그런 일을 겪은 적은 처음이지만 일본인 친구들과는 경험한 적이 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라 이것도 낯설었다.

'당신이 내 나라에 왔으니, 내 나라 말을 써야지!'하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이었다면 멋지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가 않아서, 기대이하였다. 그들의 자부심은 소문만 무성했던 것 같다.

영어 잘 하면 잘난사람? 이건 아니다. 여러 외국어 할 줄 알면 대화에서 우위에 있는 것? 글쎄다. 나는 그 아주머니가 그렇게 불편해 하고, 부담스러워 하고,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냥 영어 좀 못 하더라도 표정만으로도 몸짓만으로도 의사소통을 할수도 있었을텐데.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안 쓰는 나라 말을 못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머니에게 손으로 얘기했다. 답이 없다. 외곽으로 갈수록 질문을 영어로 하더라도 대답은 이탈리아어 100%다. 알아듣기는 해도 말이 안나오나 보다. 바디랭귀지는 아주머니께 더 큰 부담만 준 셈이다.

결국 말이 필요없이 아주머니가 타는 버스를 따라탔다. 어딜 가든지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어딘가 또 모르는 곳에서 내리면 새로운 여행이 되겠지. 아무도 타지 않는 버스를 타는 것보다 한 두 마디나마 말을 걸어본 사람을 따라가는 게 마음 편하기도 했고, 그 버스에 사람도 많이 타 있기에 선택했다. 사람이 많이 탔다는 것 자체가 실패 확률을 줄일 것 같았다.


누가 버스비 내는 법 좀 알려주세요.


버스에 타서도 차비를 낼 줄 몰라 무임승차를 했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대중교통 타는 법을 몰랐던 건 초등학교 입학하고 처음이다. 표나 토큰 파는데도 없고, 옆 사람들에게 돈내는 법을 물어봐도 사람들이 나를 피했다. 내 행색이 불편했을까 자책도 해본다. 그런 내 모습이 불쌍했는지 의자에 앉아 있던 흑인이 일어나서 도와준다. 버스내에서 파는 표를 사다가 펀칭까지 해줬다. 로마는 표를 사서, 날짜를 찍으면 유효, 안찍으면 무효다. 무효는 무조건 무임승차. 벌금 50유로라고 한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북적이는 이탈리아 버스를 타고 달렸다. 그는 내게 친절을 베푼 대신 좌석을 잃었다. 그러다 보니 같이 서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왔다.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 외국인 마음을 좀 더 알아주는 것일까. 국적을 알고 다시 보니, 아프리카 사람 하고는 다른 얼굴로 보였다. 호텔 프런트에서 일을 하는데 오늘은 비번이라고 한다.

남아시아에서는 영어가 공통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나를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인들로 가득한 버스에서 어쩌면 버스 안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옆에서 자꾸 혼자 떠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핸즈프리로 통화하는가 했더니 혼잣말이다. 성당 앞에서 밥을 먹을 때도 계속 혼자 떠들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 도시는 뭔가 광기가 있는 것 같다. 무료 급식 먹을 때야 이해를 하겠지만 버스 안에서도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다. 로마에서는 길에서 혼자말 하는 사람을 4일 동안 4번 만났다.

떼르미니에서 우르르 내렸다. 승객들 대부분 거기서 내렸다. 많은 버스들이 중앙역으로 연결 돼 있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의 휴일을 빼앗을 순 없었다.

그러고 보니 로마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 중 절대다수가 외국인이었다. 대화 상대들의 국적이 겹친 경우도 별로 없었다. '세계의 수도'라고 했던가. 지금은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로마는 국제적인 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역에 온 김에 다음 행선지를 검색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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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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